1921년 9월 9일 평안남도 중화군 청학리에서 아버지 지대린과 어머니 김대길의 자녀 6남내 중 4째로서 2남으로 태어나다.
1928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다.
1929년 4월 고향에 있는 중화공립보통학교에 입학아여 1935년 3월에 졸업하다.
1934년 1월 25일 중화천주교회에서 메리놀선교회 소속 요셉 클먼(Josehp Calmon) 신부로부터 영세(세레명 : 예언자 다니엘 Dniel)를 받다.
1936년 3월 소신학교(小神學敎)격으로 서울 혜화동에 있는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에 입학하다.
1940년 8월 병으로 인하여 동성상업학교를 중퇴하다
1942년 2월 평양지방법원 중화출장소에 근무하다.
1943년 3월
함경남도에 있는 가톨릭 덕원신학교 중등과 5학년에 편입학하다.
1944년 3월 위 덕원신학교 고등과에 진학하다
1944년 5월 아버지 지대린 씨가 돌아가시다.
1946년 3월 위 덕원신학교 철학과에 진학하다.
1948년 3월 위 덕원신학교 신학과로 진학하다
1949년 5월 북한의 공산정권에 의하여 덕원신학교가 폐쇄됨에 따라 학업이 중단되다.
1949년 5월∼9월 남한으로 탈출하다 체포되어 황해도 해주에서 감옥에 수감되다.
(이 때의 수기로 「내가 겪은 공산주의」가 있다.)
1950년 1월 17일 월남에 성공하다.(이때 같이 동행 월남한 사람은 현 광주대 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이다.)
1950년 2월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에 편입학하다.
1950년 6월
6·25 한국동란으로 학교와 더불어 부산으로 피난하다.
1950년 9월 국군에 지원 입대하여 전투에 참가하다.
1951년 12월
북진하는 도중 군인의 신분으로 고향을 찾았으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가족은 죽거나 풍지 박산된 사실만 확인하다.
1952년 2월 횡성 전투에서의 부상으로 인하여 후송 끝에 병원에서 제대하다. 이때 동생 지학삼(池學三)이 단신으로 월남하여 군(해병대)에 입대, 전투 중 역시 부상으로 육군 제3병원 마당에서 극적으로 만났다. 그후 서로 헤어졌는데 다른 병원에 입원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편지 왕래 끝에 만나다.
1952년 2월 17일
군에서 제대함과 동시에 서울 가톨릭대학에 다시 복학하다.
1952년 12월 15일 전시 중 사제로 서품을 받다(부산 대청동 성당에서 노기남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다.)
1953년 1월 부산 거제포수용소교회에서 종군신부로 일하다.
1953년 11월 청주 북문로 성당의 보좌신부로 봉직하다.
1956년 10월 로마에 있는 뿌로빠간다 대학에 유학하다.(교회법 전공)
1956년 6월
위 대학에서 교회법 석사학위를 받다.
1959년 6월 위 대학에서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다.
1959년 7월 천주교 청주교구장 비서로 봉직하다.
1960년 3월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신학부 교회법 교수로 취임하다.
1962년 4월
부산 초장동 천주교회 주임신부로 부임하다.
1965년 6월 천주교 원주교구 창설과 함께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로 서품받다.
1967년 9월 원주 시내에 진광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쓰다
1968년∼73년 천주교 군종신부단 총재로 취임하다.(1972년 2월까지)
1968년 10월 원주지역사회 문화활동의 전당인 가톨릭 센터를 건립하다.
1970년 3월 학교법인 진광학원 내에 협동연구원을 설치하여 강원도 내 신용협동조합을 보급 육성하였다.
1970년 9월 원주 문화방송 주식회사 설립에 참여(주식 40%)하여 방송을 통한 복음전파와 지역 사회 언론 창달에 기어코자 노력하다.
1971년 10월 천주교 원주교구의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을 이끌고 원주시 원동성당에서 「사회정의 구현과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3일간 갖다.
1972년 8월 남한강 유역의 대홍수로 수만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온세계 가톨릭 구호기관에 호소하고 농촌 및 광산지역의 수재민 구호에 앞장서다. 수해농민 및 광산근로자를 위한 구호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천주교 원주교구 재해대책사업위원회(1979. 10 천주교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로 개편)를 설치하다.
1972년 9월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터) 한국위원회 이사장으로 추대되다.
1972년 10월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가톨릭 평신도사도직 전국협의회,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 가톨릭 여성연합회, 가톨릭 위사협의회 총재주교가 되다.
1973년 6월 노동자 교육문제를 다루기 위한 신구교 연합 「한국노동교육협의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다.
1973년 11월 서울 YMCA에서 반독대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지식인 선언」에 서명 참여하다.
1974년 7월 6일 항공기(CPA.450) 편으로 해외여행에서 귀국 후 김포공항에서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다.
1974년 7월 10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정의의 실천은 주교들의 의무"라 하여 지학순 주교를 지지하면서 지 주교를 위한 기도를 호소하는 발표문을 내다.
1974년 7월 11일 오후 10시에 중앙정보부에서 나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연금되다.
1974년 7월 15일 검찰 조사 후 후암동에 있는 동생 지학삼의 집으로 주거가 제한되다.
1974년 7월 16일 당뇨병으로 기관원의 감시하에 서울 성모병원에 입원, 이날 기소되고 밤늦게 공소장이 병원으로 송달되다.
1974년 7월 23일 아침에 "유신헌법은 진리에 반대되고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며 "공판을 위해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출두할 수 없다."는 내용의 양심선언과 사건과 관련된 비망록을 내외신 기자와 신자들 앞에서 발표하다. 이 날 12시 15분 중앙정보부에 연행되다.
1974년 8월 7일 제 2회 공판에서 양심선언 발표부분이 추가로 기소되다.
1974년 8월 9일 제 3회 공판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구형에 이어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의 형을 선고받다.
1974년 8월 26일 천주교 평신도사도직 전국협의회 및 사제단이 양심선언과 유신철폐 및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다.
1974년 9월 서울구치소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게 보내는 옥중서한과 김수환 추기경과 교우들에게 보내는 옥중 메시지 발표(9월 11일 명동성당의 대기도회에서 사제들에 의해 낭독되다.)
1974년 9월 24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원주 원동성당에서 결성되고 9월 26일 제 1차 시국선언이 명동성당 기도회에서 발표되다.
1974년 10월 7일 비상고등군법회의 (재판장 이세호 대장)의 항소심 공판 최후진술에서 "종교의 자유란 종교에서 가르치는 사회정의를 발언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유"여야 하며 "조국과 교회를 위해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취지의 최후진술을 하다
1974년 10월 9일 가톨릭 대학 신학부에서 개최된 전국 성년의 해 기념미사에 운집한 3만여 신자들이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대치 및 시위를 벌임.
1974년 11월 26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전국 12개 교구에서 동시에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
1975년 2월 3일 민주회보국민회의 상임대표 윤형중 신부는 권력의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양심 선언을 제창하다.
1975년 2월 17일 구속집행정지로 8백여 명의 환영인파 속에 서울구치소에서 출감되다.
1975년 2월 18일 명동성당에서의 환영미사에서 "부도덕에 대한 질책은 교회의 의무요 진리운동"이라는 내용의 강론을 하다.
1975년 2월 19일 해외여행과 구속기간을 포함하여 10개월만에 원주교구로 복귀하다.
1975년 4월 인류발전과 사회개발을 위한 천주교 주교회의 산하 「인성회」총재로 취임하다.
1975년 9월 사회안전법의 철폐를 위한 공동투쟁을 요구하는 서한을 신민당 김영삼 총재에게 발송하다.
1976년 8월 9일 명동성당에서 "한국교회의 위기와 그 극복"이라는 제목으로 강론하면서 독재권력에 맞서기 위한 사랑의 연합운동을 제창하다.
1977년 3월 22일 3.1사건의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윤보선 씨 등과 「민주구국헌장」을 발표.
1977년 9월 9일 은경축(사제서품 25주년 기념)을 맞이하다.
1977년 11월 옥중에 있는 김지하 시인을 구출하기 위하여 교회지도자와 문인들을 중심으로 「김지하 구출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추대되다. 「김지하 구출위원회」는 서울 ·대구·부산·광주·원주 등 전국 16개 주요도시에서 「김지하 문학의 밤」을 개최하다.
1978년 1월 신구교의 활동단체들의 협의기관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제3대 회장으로 선임되다
1978년 5월 충북 제천시의 문화돌동의 전당인 제천 가톨릭센터를 건립하다.
1979년 1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에 제4대 회장으로 재차 추대되다.
1979년 8월 Y.H.산업회사의 근로자들의 신민당당사 농성사건과 가톨릭 농민회 오원춘 사건으로 구체적으로 수난당하고 있는 시기에 영등포 산업선교회관에서 「한국교회사업 선교협의회」가 주최한 신구교 연합기도회에서 "노동자 농민의 인권은 보장되어야 하고 Y.H.사건과 오원춘 사건의 진실을 밝히라"는 요지의 강론을 하다.
1976년 10월 교구 내 광산지대 및 빈곤한 농촌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정서적인 교육과 올바르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고 또한 일터에서 일하는 일하는 부모들의 손을 덜어주기 위한 아동복지사업으로 황지, 사북, 횡성, 문막 등 15개 지역에 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
1980년 4월 강원도 사북읍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어용노조 간부의 추방과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집단항거사태 이후 구속된 노동자들을 위해 가족들을 대신하여 변호사 4명을 선임해 주고 가족들의 생활을 보살펴 주다.
1981년 5월 원풍모방(서울 대림동소재) 노동자들이 모금한 5,200만원을 희사받아 이를 기금으로 하여 「한국근로자 복지협의회」(이사장이되다)를 조직하여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교육을 통한 의식개발에 힘쓰다.
1981년 9월 9일 회갑을 맞이하다.
1982년 1월 원주 가톨릭 센터 내에 「가톨릭의원」을 재설하여 시내 빈민 지역의 결핵환자를 진료토록 하다.
1982년 4월 원주교구 내 동해안 영세어촌을 위하여 15개 부락 1,000세대를 대상으로 소득증대사업(양식, 어로, 생산시설 개선등)과 의식개발고 협동생산을 위한 교구 사업을 추진하다.
1982년 4월 3일 분산 미문화원사건과 관련한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그들의 법률구조를 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다.
1982년 5월 3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주최 신앙대회에서 "사제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강론하면서 최기식 신부의 행동의 정당성을 확인하다.
1982년 8월 천주교 원주교구 주최로 개최된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에서 고문 철폐운동을 제창하다.
1983년 11월 한국 가톨릭 결핵사업 연합회 담당주교
1984년 8월 한국 가톨릭 맹인선교회 담당주교
1984년 11월 한국 가톨익 아동복지 협의회 담당주교
1985년 3월 5일 학교법인 대건학당 이사
1985년 5월 27일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담당주교
1985년 9월 20일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사업에 참가, 평양방문
1986년 2월 20일 강원대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
1986년 11월 7일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협의회 지도주교
1987년 2월 25일 인권보호 특별위원회 위원
1987년 4월 15일 국토통일원 고문
1988년 2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평신도 주교위원회 위원장 주교
1988년 6월 7일 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 설립
1988년 7월 지역감정해소 국민운동협의회 위원
1988년 9월 9일 제1회 한국 가톨릭 장애사 신앙대회 대회장
1990년 2월 19일 서강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1991년 재단법인 일가 기념상재단 고문
1991년 10월 남북한 장애인 걷기운동본부 본부장
1993년 3월 12일 서울 강남 성모병원에서 선종하시다.
1993년 3월 16일 배론성지 성직자묘에 안장되시다.